우크라이나의 비핵화와 대만의 도전: 안보의 교훈

최근 UN 총회에서 중요한 결의안이 논의되었다. 이 결의안은 국제 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한 대응 방안을 제시하며 주목을 끌고 있다. 각국의 다양한 의견과 논의가 오갔고, 그 과정에서 여러 쟁점이 부각되었다.

특히 환경, 인권, 평화 유지와 같은 주제들이 주요 안건으로 올라오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 결의안이 채택될 경우, 세계 여러 나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앞으로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국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사건이다.

우크라이나의 군축 결정과 그에 따른 아쉬움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94년 우크라이나가 미국, 러시아, 영국과 체결한 부다페스트 각서다. 이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자국의 영토를 안전하게 보호받고 러시아의 무력 사용을 자제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보장과 약속들이 실제로는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지키는 데 한계를 보였고, 결국 그 결정이 큰 후회를 남겼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기댈 곳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현실적 위험을 간과하게 만들었고, 이는 지금의 상황을 더욱 안타까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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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약속의 개념은 Assurance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각서나 합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 Assurance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선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약속을 위반하더라도 상대국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는 있지만, 법적인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Guarantee는 상황이 다르다. 국제 조약에서 Guarantee와 Assurance 간에는 명백한 법적 구속력 차이가 존재한다. Guarantee는 국제법상 공식적인 조약으로 인정받으며, 이를 서명한 국가들은 법적인 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나토(NATO) 회원국 중 하나가 공격받을 경우 모든 회원국이 공격을 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집단 방위 조항이 바로 Guarantee의 사례이다.

Guarantee를 위반하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그 국가를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히게 하므로, 이 계약을 지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각서가 Assurance로 선언되었기 때문에 정당한 Guarantee를 기대하지 못했던 점을 후회하고 있다.

결국, 국제 관계에서 이러한 약속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Assurance는 정치적 관점에서의 약속일 뿐이고, Guarantee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식적인 조약이므로, 이들 간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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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미국 상원의 비준을 통해 미국의 국내법과 동등한 효력을 지니는 약속으로, 한국에 대한 강력한 보호를 제공한다. 이 조약의 제3조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공격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방어의 원칙은 상반된 책임도 내포하고 있다. 즉, 미국이 공격받았을 경우 한국 역시 이를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대응해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이와 유사하게, 대만도 1954년 체결된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었던 경험이 있다. 이처럼, 국제 관계에서의 군사적 동맹은 상호 간의 의무와 책임을 명확히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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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미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지만, 오직 미국만을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1964년에 중국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핵 클럽에 가입하면서 양국 간의 군사적 균형이 크게 깨졌기 때문이다. 마오쩌뚱은 이를 염두에 두고 양탄일성 계획이라는 군사 전략을 추진했다. 이 계획에서 '양탄'은 두 개의 폭탄, 즉 원자탄과 수소탄을, '일성'은 하나의 인공 위성을 의미한다. 실제로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핵 실험에 성공하며 이 계획의 가시적 성과를 보였다.

대만의 지도자 장제스는 1945년 일본이 핵폭탄 두 발로 항복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미국에 세 명의 물리학자를 보내 핵 기술 연구를 의뢰했다. 하지만 1949년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배 후 대만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장제스의 핵폭탄 개발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사이, 마오쩌뚱은 대만의 핵 무장이 중단된 상황에서 먼저 핵 무장을 완성했다.

장제스는 이스라엘의 핵 개발 모델을 참고하여 '신주 계획'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신주 계획은 대만 서부 지역 신주에 있는 칭화대학 내에 연구팀을 구성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칭화대학에는 미국에서 도입한 연구용 원자로가 있어, 핵무기 개발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1950년대 말 ‘디모나 계획’에 따라 프랑스의 핵 기술을 도입하여 핵무기를 보유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대만은 그런 이스라엘의 핵 개발을 이끌었던 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를 초빙하여 고문으로 영입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이 신주 계획은 대만의 여야 간에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핵무장 정책이었다. 그러나 야당이 미국의 반발과 경제적 부담, 그리고 좁은 국토를 이유로 반대하자 장제스는 결국 신주 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장제스는 신주 계획을 한층 비밀스럽게 '타오위안 계획'으로 전환하였다. 타오위안 계획은 대만 타이베이시 외곽의 타오위안현이라는 지역명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이 지역에는 국방부 직속의 과학 연구소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장제스는 이 연구소를 중산 과학 연구원으로 확대 개편하기에 이른다. 중산 과학 연구원은 전투기, 미사일, 전자전 및 화학전에 대한 무기 개발을 발표한 후,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라늄은 미국의 감시를 피하며 남아프리카에서 조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대만의 군사적 독립성과 자주권을 강화하는 데 큰 지원이 되었고, 지역 안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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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원자력 관련 자원과 장비를 확보하면서 대만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남부 핑동현에는 지우펑기지라는 지하 핵실험시설을 조성하며 연구와 개발을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1975년에는 대만의 역사적 인물인 장제스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아들 장징궈는 아버지가 추진하던 핵무장 정책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1979년에는 중국의 덩샤오핑과 미국의 지미 카터가 수교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미국은 덩샤오핑이 주장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대만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고, 대만에 대해 보장하고 있던 핵우산 및 상호방위조약도 폐기하였다. 대신 대만에게는 중국과 합의한 6개의 보장만 제공하기로 하여, 이 시점에서 대만의 무기 개발 및 외교적 입지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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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점점 더 절박해진 상황 속에서 핵 개발을 더욱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1980년, 대만은 농축우라늄 기술을 성공적으로 확보하였고, 이는 그들의 군사적 야망이 더욱 커짐을 나타냈다. 당시 대만군의 참모총장과 중산과학연구원 원장을 겸임했던 하오보춘은 그의 회고록에서 1986년에는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고 언급했다.

미국은 대만에 대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 바 있다. 대만에 무기를 공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이에 있어 중국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대만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데 있어 대만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와 함께 대만과 중국 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으며, 대만이 중국과의 협상에 강요받지 않도록 하였다. 이처럼 미국의 지원은 있지만, 확실한 보호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임을 대만은 인식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만은 이러한 무기 공급과 외교적 지원 속에서도 보다 강력한 방어력을 확보하기 위해 부족한 투발수단—즉 미사일과 항공기—을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대만의 이러한 노력은 국가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었으며, 그들의 군사적 독립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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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80년대에 중산과학연구원에서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핵물리학자 허리웨이는 'MIT'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에서는 핵무기 제조가 거의 완료되었고, 결정이 내려지면 단기간에 핵폭탄을 제작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언급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MIT'라는 이름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이 아닌 'Made in Taiwan'의 머리 글자를 따온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제작할 능력은 갖추었지만, 실제로 발사할 방법이 없어 내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내용도 책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발언은 핵무기를 자폭용으로만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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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과학연구원에서 핵개발을 이끌고 있던 하오보춘 원장 아래에는 장센이라는 부소장이 있었다. 그는 물리학을 전공한 후 정부 장학금을 받아 미국 테네시대학에서 원자력공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재였다. 대만으로 돌아온 장센은 군에서 대령 계급으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하지만 1988년 1월 9일, 장센은 칭촨강공항에서 미국의 특별기에 가족과 함께 탑승하여 도주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후 1월 12일, 그는 미국 의회에서 대만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폭로하며 중요한 증언을 했다. 그가 의회에서 한 발언은 대만 정부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미국 정부는 대만에 강력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핵 개발 계획을 즉시 중지하고 핵 시설을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대만과의 관계에서 신뢰성을 유지하려 했다.

장센의 증언 다음 날인 1월 13일, 장제스 총통의 아들 장징궈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심각한 당뇨병을 앓고 있었던 상황에서 장센의 폭로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가 총통 권한대행으로 지명되었지만, 그는 정치적 힘이나 지지 기반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결국 리덩후이는 미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사를 수용하게 되었고, 핵개발 중단을 결정짓게 되었다. 1월 15일, 국제원자력기구는 대만에 대한 특별 핵 사찰을 시작하였고, 관련 시설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이는 대만의 핵 개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국제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대만의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국제적인 핵 안전 문제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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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핵 개발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이야기 속 주인공인 장셴이는 미국 테네시대학교에서 원자력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소속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CIA의 지시에 따라 중산과학연구원에서 20년간 대만의 핵 개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며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만은 자신들의 핵 개발이 극비로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미국의 손아귀에서 조종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대만의 경우, 그들은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계약에 대한 실수를 범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문제 해결을 위한 계약서가 중요한 상황에서, 일이 잘 풀릴 때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지만,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면 계약서를 다시 꺼내어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할 방법을 철저히 찾아보려는 경향이 있다. 현실 속에서는 말이나 약속이 시간이 흐르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의미가 사라지기 일쑤이다. 성격의 문제가 있는 사람은 개선하며 함께 할 수 있지만, 믿을 수 없는 사람과의 협업은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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